2016년 3월 9일

자료실

세계 레지오 마리애의 역사 #2

작성자
웹마스터
작성일
2016-05-06 15:10
조회
1381

<4> 레지오 마리애 창설과 발전

프랭크 더프는 독서를 좋아했다. 어느 날 헌책점에서 그리뇽이 쓴  「마리아께 대한 참된 신심」이란 책을 구입했는데 언젠가 소개받은 책명이어서 한 번 읽어 보았으나 별 흥미가 없었다. 평소에 프랭크 더프가 존경하는 톰 활론이  「마리아께 대한 참된 신심」이란 책을 읽도록 적극 권유하였다. 거절할 수 없는 처지이기에 반복해서 여섯 번 정도 정독하니 그는 비할 수 없는 큰 깨달음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그에게 독서를 권유했던 톰 활론은 사제서품을 받았다. 프랭크 더프는 얼마 뒤에 어느 수사 신부가 소개해 준  「마리아께 대한 참된 신심」란 책을 정독한 후 아주 큰 감동을 받았으며 이 책에서 성모님께서 생생하게 당신에게 말씀하신 내용과 의미를 깨닫고 감사하게 생각했다.

레지오 마리애는 더블린의 프란시스 가에 있는 마이러 하우스에서 시작되었다.

마이러 하우스는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회 소유였다. 그 전에 이 건물은 아이버그 경의 오락장이었다. 그러다가 현재 불 로드에 있는 거대한 오락장이 완공되자 건물이 비었다. 원래는 베이컨 공장이었던 이 건물이 오락장 이전으로 비게 되자,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회의 프란시스 사 협회에서 소유주 도넬리 부인으로부터 무상으로 인수받았다. 당시에 회장직에 있던 프랑크 스위니 씨의 공이었다.

이 건물을 인수받음으로 해서 부지불식간에 레지오 마리애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인간적인 생각이지만, 만일 회합 장소가 없었더라면 레지오는 결코 발생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인수되기 전에는 이 마이러 하우스는 사실상 방치된 상태로 있었다. 방 하나는 그 동안 남자들의 지부 클럽에서 사용해 왔었다. 그리고 넓은 홀은 일요일이면 빈첸시오 회에서 아이들에게 무료 아침 식사를 제공하는 데 빌려 썼었다.

이 집은 프랑크 스위니 수사와 몇몇 사람들의 등장으로 크게 변모되었다.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회원들이 무더기로 몰려들었다. 원래의 협회가 둘로 나누어져, 성 바드리시오란 이름으로 두번째 협회가 탄생되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시내 남부에 위치한 파이오니어 회 지부 하나가 여기에 가세하였다. 토허 신부가 성 바드리시오 회와 파이오니어 회 양쪽의 영적지도를 담당했다. 파이오니어 회는 마이러 하우스 사업에 여성들을 끌어들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함으로써 레지오 설립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당연히 일요일 아침 무료식사 준비에 참여하여 음식을 장만하고 아이들에게 배분해 주는 일을 도왔다.

수사들 중에 하나가 아침식사에 오는 아이들을 면담한 결과 그들 중에 많은 아이들이 실제로 무료식사를 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어느 날 아침에 무료식사에 온 아이들의 이름과 주소를 적어서 부활절 월요일에 그들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방문을 끝내고 나서 내린 결론은 그들 가운데 무료식사를 필요로 한 아이는 단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부모들은 모두 직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무료식사에 가면 아이들을 적절하게 보살펴 주고 미사에 참여하게 해주기 때문에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을 알고나서 결국 무료 아침식사 제도를 폐지시켰다.

부인네들은 이제 마이러 하우스에 갈 명목이 없어지게 된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들 크게 실망하였다. 그러나'죽은 것들은 없고 사는 것이 있을 뿐이니….'

파이오니어 회가 일을 시작하고 회원들을 구하러 나섰다. 수사들 중에 한 사람이 매일같이 메리온 광장에 있는 기도원에 나가는 별로 젊지는 않은 부인 한 분을 생각해 냈다. 가끔 앞치마를 두른 채 들리는 것을 보면 그 근처 어디에선가 일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 수사는 그녀의 태도와 신심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용기를 내어 어느 날 그녀를 찾아가서 요즈음 말하는 가톨릭 액션에 몸담고 일하고 있는지 물었다. 그녀는 ?죤 골목회? 회원으로 있다고 했다. 그리고 파이오니 회 회원이 되어달라는 부탁을 기꺼이 승락하였다. 그녀가 바로 레지오 마리애의 초대 단장인 엘리사벳 커완 여사로 우리들과 함께 기쁘게 생활하고 있었는데 커완 부인은 그 후 선종했다. 일주일에 한 번 본부를 개방하여 회원 신청서들을 접수하였다. 그리고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자리를 마련하여 규칙 설명과 회원의 특전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성심께 의지하는 일이 회원의 진정한 바람이 됨을 특히 강조하였다.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 회의를 이끌어갈 파이오니회 회원들을 통솔할 평의회가 구성되었다.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 회 수사들 여럿과 다수의 부인들, 도넬리 양, 무료 아침식사 위원회 회원 몇 사람, 커완 부인, 그 밖에 몇몇이 파이오니어 회에 들어와 있었다. 이들 여자들은 마이러 하우스 사업에 지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모든 일에 도움을 주었으며 특히 여자들의 봉사가 필요한 일들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물론 파이오니 회 덕분에 레지오 마리애가 탄생되었다고 하면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 회에 대한 공정한 처사가 못 될 것이다. 그리고 실제상으로도 그와는 거리가 멀었다. 레지오 마리애에 실질적으로 책임을 맡은 것은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 회였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파이오니어 평의회를 매개체로 해서 일에 착수할 여성들을 끌어들였다.

파이오니어 평의회는 처음부터 회의 형태를 명확히 갖추고, 특정한 기도들을 정하고, 사업에 대한 깊은 관심을 계속 유지 시키기 위해서 보고 체계를 확립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결국 이런 조건들이 마련되었다. 개회기도는 로사리오 다섯 단에다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 회 기도문에서 몇 가지 기도를 따오고, 거기다가 영적 독서를 가미하기로 했다.

다음에 지난번 회의 때 기록한 회의록을 낭독하여 서명하고 회의 안건으로 들어가기로 되었다. 정해진 의사일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규 파이오니어 회 안건들은 얼른 처리하고 참석한 남녀들이 종사하고 있는 몇 가지 사도직 사업에 관한 보고를 들었다. 이제 마이러 하우스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활동들이 평의회에서 서로 교류되게 되었다. 남자들은 가정이나 병원을 방문하여 사람들을 만났고, 여자들은 특수한 일에 종사하거나, 교리문답 혹은 다른 공부반을 가르쳤다.

하느님의 섭리가 레지오 마리애의 기반을 닦고 전체적인 토대를 형성시켜 왔음을 생각할 때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 때의 기도들은 미구에 레지오가 바치는 기도들을 예시해 주었다. 다음 이 회합들과 까떼나의 시간 규정에 관한 레지오의 뜻을 어떤 식으로 제시해 주고 있는지 살펴보자.

평의회 회합은 오후 4시 30분에 열렸다. 6시에 삼종을 알리는 성당의 종소리가 길 건너서 들려오면 진행하던 일이 어떻게 되어 있든지 간에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삼종경을 바치고 회의를 끝냈다. 회원들이 다시 자리에 앉으면 부인들이 차를 준비하였다. 그 동안 개별적으로 활동과제와 방법상의 문제를 놓고 비공식적인 토의를 벌였다. 이런 식으로 세월이 흘러갔다. … 1918, 1919, 1920, 1921년.

제반 문제들이 이들 회합석상에서 논의되었다. 토허 신부는 항상 참석하였고 물론 커완 부인과 머레이 양(현재 고난회 수녀로 있는)과 성모 승천회 수녀로 있는 릴리 코우프 양, 후에 커완 부인에게서 쁘레시디움 단장직을 물려받게 된 로즈도넬리 양과 그밖에 열한 명도 자리를 지켰다. 이 열한 사람의 명단은 레지오의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다.

그 당시 자주 토론되던 주제들 가운데 하나는 그리뇽 드 몽포르의 참된 성모 신심이었다. 그 내용은 그때 아주 희귀한 것이어서 사실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 신심을 도모하는 출중한 사람들마저 그 의미를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나 모두들 이에 대한 관심이 너무나도 커서 그 문제를 토의하고 그 뜻을 파악하기 위하여 특별한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에 관계했던 사람 하나는 이런 말을 했다.'나는 가끔 이 특별한 일에 참석하려고 약 한 달 전부터 애썼다. 이 일은 레지오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 그러니까 약 한 달 전에 있었던 일이다. 마치 전기를 통하게 하여 뭔가 일어나도록 만드는 일 같았다. 우리는 이 신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저녁을 보냈다.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온전하게 이해하였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최소한 열렬히 공감했다고는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신심을 실천에 옮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리하여 이내 레지오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보잘것없는 레지오 마리애의 회합이 최고의 속력으로 내닫고 있었다. 어느 일요일, 평상시 대로 열린 평의회에서 회원들은 자신이 한 작은 일들을 이야기해 나갔다. 그러다가 현재(1938년) 아이러 하우스의 관리자로 있는 머트 머래이 차례가 되자 그는 다른 형제 한 사람과 바로 그날 아침 더블린 유니온을 방문했다고 말했다. 묘하게도 여자들 병원을 찾았다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무척 바쁘게 움직여 오셨을 것이다. 이 간단한 보고는 상상하기 어려웠고, 그러면서도 듣는 이들에게 특별한 효과를 내는 아주 감명깊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회의가 계속되고 있을 때 삼종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도 세상을 뒤흔들어 놓을 중대한 일들이 일어나리라는 사실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삼종기도를 바치고 나서 모두들 보통대로 차 대접을 받았다. 차를 돌리던 중에 그 자리에 왔던 여자 두 사람이 자기네 실무자들 몇 사람에게 다가와서 물었다.'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 회에서 매 일요일 아침마다 유니온을 방문하는데, 우리도 그런 비슷한 일을 할 수 없을까요?'

대답이 있었다.'도움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두 분 외에 사람들이 더 있습니까?'

그들은 물러가더니 조금 있다가 찻잔들을 덜그럭거리며 돌아와 말했다.'몇 사람에게 물어 보았는데 희망자가 벌써 여섯 사람은 돼요.'

'그래요. 여섯이면 대단한 숫잡니다. 시작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여섯 사람이 함께 모여 그 문제를 논의하였다. 회합은 오는 수요일 저녁에 건물 뒷쪽 방에서 갖기로 하였다. 시간은 편의상 여덟시로 정했다. 모두가 지원을 얻고자 자기 친구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고 다녔다.

마침내 수요일 저녁이 되어 회의가 소집되었다. 토허 신부와 프랭크 더프 등 15명이 자리에 나왔다.(그들은 그들이 이름을 높이 받들어 모시려는 바로 그분이 앞에 계시는 것을 알고 무척 놀랐다.) 그들은 그분의 깃발 아래 그분의 수호를 받으며 병사로서 일하려는 마음가짐으로 회의에 나왔는데 이상적인 군대의 경우 모두가 다 그렇듯이, 사령관이 먼저 나와 그들의 입회를 기다리고 계셨다.

그들이 방 안으로 들어왔을 때 평상시에는 쓸쓸하게 놓여 있던 탁자가 오늘날 쁘레시디움 회합 때처럼 장식되어 있었다. 탁자에는 하얀 보가 씌워져 있었고 그 밖에도 무염시태 성모상과 꽃이 꽂힌 화병 두 개와 불이 켜진 촛대 두 개가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흔히 쓰는 레지오 제대도 있었다.'여왕께서 당신 병정들을 기다리고 계셨다.'

누가 그렇게 장식해 놓았는지는 몰랐었다.(후에 안 일이지만 최초의 쁘레시디움 단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제대 준비를 해 두었다. 그녀는 후에 수녀원에 들어가 카나다에서 선종하였다.) 그렇게 하라는 지시도 없었다.

기적처럼 이루어진 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누군가가 그런 영감을 받은 것만은 틀림 없었다. 회의가 시작되었다.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 회 기도문을 사용했다. 성령께 간구하는 기도를 바치고 이어 로사리오 다섯 단을 바친 다음에 갑자기 목청을 높힌 외침이 나왔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티없이 깨끗하신 마리아 성심이여,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 성 요셉,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

이 기도들은 그 후 오랜 세월동안 레지오 단원들의 입을 통해 바쳐져 왔다. 마지막 기도는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 회 마지막 기도로 끝났다. 이 기도는 우리 스스로 기도문을 마련할 때까지 계속 쓰였다. 개회기도가 끝나자 영적 독서가 있었다. 그런 다음에 참석자들은 모두 자리에 앉아 자신들도 모르는 가운데 레지오 마리애를 이루는, 세계의 위대한 역사적 사건 속에 몸을 담았다.

첫째 문제로 장차 수행하려는 사업에 대한 후원이 거론되었다. 그에 대한 즉각적인 대답은 그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것은 복되신 성모님께 봉사하기 위한 것이라는 대답이었다. 그것으로써 다음 일이 분명해졌다. 매주 회의를 갖고 한 주일 단위로 일을 한다는 것이었다.

무엇이 그 회합의 골격이 되기로 되었던가? 그리고 기도는 어떠했던가? 그들이 이미 바쳤던 것들 이외에 무엇이 있었겠는가?

그들은 무슨 사업을 하기로 되었던가? 더블린 유니온 병원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들을 결속시켜 주었다. 그 사업은 바로 첫번째 사업이 될테지만 그러나 유일한 사업은 아닐 것이다. 행동 범위에 있어 물질적 도움을 베푸는 것 이외에 무엇이든 실질적인 활동을 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물질적인 도움은 성 빈첸시오 아 바울로 회에서 올바른 정신으로 잘 해내고 있었다. 따라서 그 분야에 위험스럽게 손댈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당분간 다른 일들은 제쳐두었다. 우선 적절하게 잘 해내야 할 일은 더블린 유니온 병원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첫번 회합 때 서기 한 사람이 선임되었다. 그녀는 아주 훌륭한 사람으로서, 장래 서기직을 맡은 자들에게 하나의 귀감이 되었다. 방문은 짝수로 가기로 하고 각 병동마다 두 사람씩 배정되었다. 그러나 암병동에 이르자 서로들간에 언쟁이 일어났다. 서로 자기네가 맡겠다는 것이었다.

현재로서는 레지오가 궂은 일에 단련되어 있어서, 오늘날 같으면 그런 방문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만 해도 그런 일은 아주 드물었다. 그리고 암병동은 곧 공포의 대명사였다. 가난한 사람들이 미리 치료를 받으려고 힘쓰지 못한 까닭에 병자들의 상태가 하나같이 중태였다. 그런데 이 새 레지오 단원들은 공포와 싸우며 그 일을 해내려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이 그 일을 맡았지만 모두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기로 하였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들은 상당한 시간에 걸쳐 작업에 임하는 정신 문제를 논의하였다. 말하자면 자신들이 방문하는 사람들 하나하나 속에서 우리 주님을 대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태오 복음 25장이 봉독되고 해설이 따랐다. 이어서 그 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레지오에 영향을 끼친 규율과 방법상의 문제들이 논의되었다. 다음 회의는 다음 주 같은 날 저녁에 같은 시간에 열기로 했다. 그 전에 모든 방문을 끝내고 제각기 보고서를 마련키로 하였다.

누군가 자비의 수녀회로 가서 이 사실을 알리고 그들의 협조를 구하기로 했다. 수녀들은 방문자들을 진심으로 환영하겠다면서, 그들을 위해서 다음 일요일에 전체 공동체가 미사와 영성체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맨 처음 레지오 마리애에 단 명칭은 ?자비의 모후?로 명명되었다. 방문을 앞둔 병원을 경영하는 수녀회가 까리따스회(자비회)라는 데서 비롯된 명칭이었다. 거기다가 묘하게도 그 달 24일이 자비의 성모 축일이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상한 사실이 있었다. 레지오 단원들은 그들이 처음 모임을 가진 날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여러 해가 흐른 뒤에 이런 일들을 서류에 기재할 필요가 있게 되었는데, 그 때는 아무도 그 날을 기억하지 못했다. 무슨 요일인지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은 오래된 회의록을 뒤져가며 날짜를 찾아내었다. 찾고 보니 9월 7일이었다. 모두들 크게 실망하였다.

회의 날짜를 성모 탄생 축일인 8일로 맞추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였다. 그렇게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레지오가 성모와 함께 탄생하여 성장하고 그분과 더불어 성공하고 그분과 더불어 자기네가 상대한 사람들의 영혼들 안에 우리 주님을 나시게 만들었다면 얼마나 멋있겠는가!

그런게 그것을 미처 생각 못하고 단 하루 차이로 축일과 엇갈리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내 생각이 달라졌다. 만일 그렇게 생각해서 날짜를 맞추었더라면 모든 것을 망칠뻔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즉 8일에 모임을 가졌더라면 만나는 시간이 8시였을텐데, 그 때는 축일이 끝나는 때였고, 사실 그들이 모임을 가진 바로 그 시간에 교회에서는 첫번째 축일 저녁기도를 바치고 있었다. 그러니 레지오는 이 축일의 첫 향기 속에 탄생한 셈이었다.'우리는 성모와 함께 탄생했던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고, 이런 이상한 일들은 레지오 생활을 통해서 항상 이루어져 왔다. 레지오는 교회의 다른 커다란 단체들과는 여러 면에서 다르지만, 특히 다른 단체들의 특징을 이루는 명백히 기적적인 표징들이나, 환영들, 불가사의한 일들, 하늘에서 유래된 선언같은 것들이 발단이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레지오 마리애에 이런 일들이 없었고 기적은 레지오 마리애의 놀라운 성장, 흥미있는 일치, 감동적인 성과에서 보다 일반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모든 것이 인간적인 유대들을 통해 실현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기쁨을 찾게 된다. 레지오의 조직이나 그 현저한 결실들 때문에 놀라면서 레지오 마리애가 정녕 어떤 뚜렷한 선언이나 기적의 개입으로 비롯된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이들 모두에게 레지오 마리애는 그런 경우와는 다르다고 못박아 두고 싶다. 레지오 마리애는 방금 설명했듯이 단순하면서도 경이로운 방식으로 이룩되었다. 레지오 마리애는 최초의 회합이 현재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다만 반드시 필요한 것이 몇 가지 있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당시는 레지오 마리애란 명칭이 없었고 기준도 없었으며 순수한 레지오의 기도문들도 없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후에 와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체계나 장치, 헌신적인 안목, 정신, 분위기, 이 모든 것들은 레지오가 첫번째 회합 때부터 완전히 성숙된 면모를 갖추고 있었으며, 오늘날의 레지오와 하등 다를 바가 없는 것들이다.

다음 수요일에 일행은 다시 모임을 가졌고, 모든 일이 시계바늘처럼 진행되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기도들을 바치고 나면 각 단원들이 각각 활동보고를 하게 되어 있다. 영적 지도는 토허 신부가 맡고 있었다. 단장은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커완 부인이었다. 그녀는 여러 가지 유익한 일들 중에서 회의에 가난이라는 특징을 부각시켰다. 그녀가 그 자리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었다. 커완 부인은 첫번째 회합 석상에서부터 진정한 레지오의 특징, 즉 회원간에 온갖 사회적 세속적 차별 일소를 강조하였다.

커완부인은 훌륭한 단장이었다. 회의장에서 유일한 연장자였지만, 주위에 모여 있는 젊은 여자들을 사랑하고 신뢰하였다. 그녀는 레지오를 아주 엄하게 다스렸다. 어느 정도 기간이 경과한 후 그녀는, 오늘날 회합 때 낭독하는 상훈(常訓)과 대충 비슷한 네 가지 조목을 회합 석상에서 월례적으로 낭독하도록 조처하였다.

그 당시로서는 이러한 행사가 레지오 시스템의 일부임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 레지오가 성장함에 따라서 단장들이 선임되어 다른 지역으로 파견되었는데, 그들은 새로운 직책을 맡으러 파견되기에 앞서 커완 부인 집에 소집되었다. 그 자리에서 그녀는 지침들을 시달하고 여러 가지 훈화를 베풀었는데, 그 중 하나는 그들에게 십자가를 내밀면서'빛을 간직하고 성령께 기도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레지오가 성장하고 가지에서 가지로 뻗어나감에 따라 어려운 일들도 발생하였다. 초심자들에게 사업과 단원직의 골자들을 가르치고 그들로 하여금 이러한 사항들을 항상 염두에 두게끔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오늘날 상훈으로 알려진 문장이 작성되어 매월 첫째 주간에 낭독하도록 시달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이것이 일종의 혁신이 아니냐는 생각도 있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저 원래 하던 행사를 다시 시작한 것뿐이었다. 이 상훈 낭독은 자비의 모후회에서 직접 파생된 쁘레시디움에서 여전히 실시되고 있었던 것이다.

몇몇 사람들이 혁신이라고 생각했던 사항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알로꾸시오였다. 그러나 이 알로꾸시오는 여러 해 동안 모든 레지오 회합의 정식 행사가 되어 왔었다. 크리돈 신부와 토허 신부는 둘이서 다년간 모든 레지오 회합들을 관장했고, 이 두 분의 훈화 말씀은 각 회합의 일부이자 한 몫을 담당했었다. 그러나 레지오가 확대되어 감에 따라서 이분들이 참석하지도 못하고 다른 지도 신부도 없는 상태에서 회합들이 열리게 되었는데 이 특정한 회합들의 경우에는 알로꾸시오가 빠지게 된 것이었다.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알로꾸시오가 빠지게 된 사실을 유의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누군가가 반드시 -사실 초창기였기 때문에- 알로꾸시오를 폐회기도 직전인 회합 끝머리에 가서 실시하기로 규정되어 있었다.

이것이 변경되게 된 경위는 이렇다. 내가 오브라이언 몬시뇰과 함께 로마에 간 적이 있는데, 그분은 자신의 회합 이야기를 하면서 줄곧 알로꾸시오를 까떼나에 바친 직후에 실시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교본에 규정된 바와는 다르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분이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분에게 그런 내 생각을 말씀드렸더니 실제로 변칙적인 운용 방식을 시인하면서도, 자신의 방식이 두 가지 점에서 효과적임을 강조하였다. 첫째로 단원들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분위기는 까떼나 직후가 더 좋다는 것이며, 둘째는 알로꾸시오를 맨 끝에 실시할 경우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거나 아니면 적어도 폐회규칙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꼰칠리움에서 세부적인 검토를 거쳐서 일단락 되었는데, 그 결과는 몬시뇰의 생각이 옳았으며, 알로꾸시오는 까떼나 이후가 가장 이상적인 순서라는 판단이 나와 그렇게 정하기로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