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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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레지오 마리애의 역사 #4

작성자
웹마스터
작성일
2016-05-06 15:11
조회
287

<6> 단원들의 순교

성모님은 사업은 평화시나 전쟁시나 계속 되었음이 증명되었다. 세계 제2차 대전 중에 영국에서 있었던 레지오 관리 운영에 대하여 알아보자. 영국에 쁘레시디움이 창설된 것은 1929년이다. 그 뒤 계속 발전되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이 발생했는데 무서운 공습이 가열되는 데도 주회는 계속되었다. 공습을 피하기 위해 방공호 속에서 주회를 계속했는데 선서할 때 공습을 받으면 선서문 몇 줄을 읽다가 책상 밑으로 숨었다가 우선하면 다시 서서 계속해서 선서를 하곤 했는데 지금 상상해 보면 눈에 선하게 열심한 모습이 보인다. 항상 방공호에서도 기도하며 특히 소년 단원까지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자세로 굳은 신념과 투철한 사명감 그리고 용맹스런 성모군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단원의 수가 증가되는가 하면 쁘레시디움도 증설되었으니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하느님의 섭리가 아니겠는가?

또한 지중해의 말타 섬(영국에 속함)에서도 계속된 공습과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독일?이태리 공군도 이 섬을 점령하지 못하였다. 전체의 섬주민들의 일치된 투쟁력이 있었지만 전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의 굳은 신심과 용맹스런 활동과 일치된 단결력의 영향력이 컸었다.

프랑스의 경우 전쟁의 비극 속에서도 쁘레시디움은 계속해서 창설되었다. 독일군의 침략으로 프랑스 북부의 피난민은 독일군의 저공 공습을 맹렬히 받으면서 남부의 네베르 지방까지 피난의 대열이 이어졌다. 이 피난민의 대열 속에는 더블린에서 파견된 베로니카 오브라이언이란 여성 단원이 끼어 있었다. 그는 꼰칠리움에서 파견된 단원으로 임무는 프랑스에 쁘레시시디움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피난민 대열에 끼여 전쟁의 공포와 굶주림에 지친 그녀는 그의 사명을 다했다. 그는 얼마 안 되어 더블린 꼰칠리움 7개의 쁘레시디움을 설립하였다고 보고해 왔다. 치열한 전쟁 속에서도 레지오 마리애가 계속 번창하였던 것은 레지오의 정신으로 활동하는 것은 한계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했다.

독일에서도 레지오는 계속 발전되었다. 전쟁의 와중에서 전쟁 포로 수용소에서 18명의 단원으로 첫 쁘레시디움이 창설되었다. 이 쁘레시디움의 창설은 오스트레일리아 레지오 단원이 수용소에 수감될 때 속주머니에 교본을 넣어 가지고 있었다. 그는 동료 포로들이 레지오 정신을 가지게 하는데 쉽게 성공하였다.

이 쁘레시디움은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해체되었지만 프랑스 강제 노동자들에 의해 창설된 또 하나의 쁘레시디움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으니 정말로 놀라운 하느님의 섭리가 아닐 수 없다.

이태리에서도 쁘레시디움이 창설되었다. 영국군대는 안찌오와 네뚜노에 상륙한 후 군부대 내에 쁘레시디움을 창설하여 매주 아빼닌 반도를 진격하면서 주회를 실시하였다. 얼마 지난 후에 교황 비오 12세 성하께서 이 소식을 접하시고 알고자 했다. 그들은 교황 성하를 알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교황 성하께서는 그들에게 소망이 뭐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로마에 레지오마리애를 도입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나자 많은 나라에서 파견자를 프랭크에게 요구하였다. 그 때마다 헙력자가 나타나는 행운이 있었다.

독일을 위해서는 비엔나에서 온 한 여성 단원이 희망해 왔는데 그녀는 히틀러를 피해 온 피난민으로서 전쟁중에 영국에서 지내며 그 곳에서 레지오를 알게 되었었다. 이태리 파견자는 이태리어를 잘하는 한 아일랜드 여성이었는데 많은 쁘레시디움을 창설하고 귀국하였다.

남아프리카의 파견에는 필리핀의 마닐라 대학 교수인 요아키나와 루카스가 모든 직위와 관록을 포기하고 20여 년 간 많은 나라에 레지오 마리애를 위해 봉헌하였다. 그런데 스페인의 경우는 독특하다. 필리핀의 마닐라 출신인 빠치따싼 또스란 여자 변호사가 변호사의 일을 멈추고 스페인에 가서 레지오를 심으려고 무척 노력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지금까지 레지오 도입이 늦추어지고 있으니 우리들의 기도가 더욱 필요하다.

인도네시아에 파견된 중국의 여성 단원인 데레사 수녀는 그 곳에 몇 년간 레지오 창설에 많은 헌신을 다하였다. 소련의 한 젊은이가 포로로 독일에 있으면서 레지오 마리애 정신을 잘 파악하고자 입단하여 이름난 명장이 되었다. 그는 독일 뮌쉔글라드바흐 본당의 사제에게 소련 자기 나라에 레지오를 전파해야 할 의무 때문에 귀국하겠다고 설명하였다. 본당 신부는 감동하면서 귀환자에게 보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5년간 세뇌교육을 위해 시베리아로 끌려갑니다. 그러나 저는 젊고 힘이 있습니다. 5년간은 기다릴 수 있습니다. 저는 치명을 당하든가 아니면 레지오 마리애를 창설하든가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귀국해서 언젠가 그림엽서 한 장을 신부님께 보내면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하시고 기도를 잘 부탁합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소련 자기 나라에 귀국 후 6년 동안이나 소식이 없어 대단히 궁금하였다. 어느 날 본당 신부에게 소련 시베리아 한 수용소에서 그림엽서가 한 장 왔다. 이어서 봉함 편지로 사업보고와 더불어 안부 편지가 왔다. 이 편지를 접한 본당 신부와 프랭크 더프는 퍽이나 감동하였고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 젊은이는 어느 서신의 끝에서  '우리는 로서아에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로서아에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로서아에 들어가야 한다'라고 거듭 결의를 전해 왔다.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성인 신부는 1943년 독일 나치스 악당에 의해 순교하시기 직전 예언하였다.  '머지않아 모스코바 크레믈린 궁 지붕 위에 높이 서 있는 깃대에 성모님의 깃발이 나부낄 날이 올 것이니 모두 회개하고 기도하라'는 내용을 이 세상에 예언하였다.

프랭크 더프는 자신이 그랬고 그러한 강한 의지력과 두터운 신심으로 불타 있듯이 다른 파견자(P.P.C)들에게도 주어진 사명감을 끝까지 수행하라고 거듭 강조하였다. 목숨을 걸고 파견되는 국가나 지역이 많았다. 그 때마다 프랭크는 불같은 용기로 성모님의 사업을 추진하자고 재다짐하고 했었다. 그런 강한 정신이 없는 자는 어떤 일이고 중간에서 포기하고 성취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파견자든 레지오 사도직에 임한 단원이든 소명의식에 의해 생명까지도 봉헌할 각오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입단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각종 십자가를 질 수 있다는 굳은 결의에 찬 단원들이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중도에서 포기한다는 것은 졸렬한 행위임에 틀림없다. 성모님께 선서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다 바칠 수 있다는 나의 선서가 아닌가?

'파견과 생명! 특별한 경우지만 어떤 단원이 파견과 생명 중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 할 때 파견을 선택해야 할 정도로 확고 부동한 자기 사명에 항상 불타 있어야 한다'라고 프랭크는 의미있는 활동강령을 주었다.

순교한 단원들이 가장 많은 중국에 대하여 알아보자.

중국에 레지오 마리애를 먼저 전파한 사람은 프랭크 더프가 처음으로, 비오 11세 교황성하를 알현할 수 있도록 주선해 준 안또니오 리베리 대주교이다. 그는 젊은 시절 더불린 교황대사관의 비서로 있다가 동아프리카의 교황대사로 임명되었는데 그 곳에서 레지오의 개척자이며 성인 시복 운동의 대상자인 에델 퀸의 레지오 증설에 따른 활동을 전폭적으로 지원하였다. 즉 자기 지역의 주교들에게 친서를 보내 레지오 마리애를 지원해서 빨리 보급해 달라고 강조하였다. 그가 가기 전에 이미 에델 퀸의 업적을 보고 감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어디에서나  '레지오 마리애는 현대의 하나의 기적이다'라고 공공연히 말했다.

세계 제2차 대전이 종결되자 교황청은 안또니오 리베리 대주교를 중국의 교황대사로 전보 발령을 했다. 그는 모택공의 공산군이 북쪽에서 남으로 밀고 올 현실을 감안하여 주교들에게 레지오 마리애를 창설하여 공산주의자들의 박해를 막아야 한다고 권고하였다. 그리고 아일랜드 골롬바노회 맥그라드신부에게 레지오 마리애 보급을 위임하였다. 몇 해 전에 북경에 레지오가 들어가 있었으나 활성화가 못 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무렵 우연히 북경 후엔 대학 청년들에 의해서 쁘레시디움 몇개가 한 주일 내에 설립되어 점차 전국적으로 번지고 있었다. 리베리 대주교는 레지오의 활성화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교황청에 보고하였다.

그러나 모택동 공산정권이 온 중국을 휩쓸 때 수난의 시기가 닥쳐왔음을 예고한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처음에 레지오 단원들을 그들 편으로 끌어들여 소위 그들이 말하는 국가 교회를 세우는 데 이용하려 했었다. 그들의 공작은 오히려 그 반대의 경향이 나타났다. 레지오 마리애가 건재하는 지방 교회에서는 국가 교회 신자들을 상대로 계몽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기 때문이다. 주회도 비밀리에 계속되었고 공개적인 투쟁도 시도되었다.

1952년은 중국의 레지오에 대한 불행스런 해이다. 공산정권은 소위 전국 일원에 레지오 활동을 금지한다고 선포하였다. 중국내에 레지오 마리애 모든 성모 군대는 모두 경찰서에 출두하여 등록하라고 명령하였다. 레지오 각급 간부들이 투옥되기 시작하였다. 가장 먼저 체포된 간부는 북경 세나뚜스 영적지도자 벨기에 인 반 코일리 수사 신부였다. 그리고 각급 레지오 조직 영적지도 신부는 특별조사를 받아야 했다. 고문이 가해지고 몸에 무거운 쇠고랑을 채워 고통을 주었다. 공산당원들은 레지오를  '비밀 발신기, 무기와 간첩단'이라 했는데 이것은 레지오의 단결력과 죽도록 충성하는 정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무슨 큰 비밀을 발견하려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지만 교본과 초와 성모상만 밝혀냈던 것이다.

중국 공산당에서는 큰 거리마다 현수막을 걸었다. 그 내용은 레지오 마리애는  '공적(公敵)제1호'란 것이다. 즉 레지오를 바티칸의 반동 간첩단이라고 맹렬히 비방하였다.

레지오 단원들은 2만명 가량 투옥 당하여 심한 고문을 당하고, 옥고를 당했으며 그 중 2천명 정도가 순교당했다. 그 이외 단원들은 매일 경찰서에 출두해야 했고 세뇌교육을 받아야 했다. 공산당은 레지오를 탈단하면 무죄로 인정하였으나 대부분의 단원들은 차라리 순교할 각오를 가졌다. 이 비극적인 소식을 접한 교황 비오 12세 성하께서는 친필 서한을 중국 가톨릭 교우들과 레지오 단원들에게 보내 격려와 위로를 주셨다.

1969년 5월 23일 꼰칠리움 레지오 사절단으로 한국에 온 맥그라드 신부는 1950년대 초에 중국에서 레지오 사목을 하면서 고통을 당한 지도신부인데 그 당시 체험담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레지오의 발생지인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성장했고, 사제 서품 이후 중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었습니다. 나는 성당도, 수녀와 회장도 없고 레지오 단원도 없는 시골 본당에서 우선 레지오를 설립하였습니다. 나는 쁘레시디움을 설립한 후 많은 기적적인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그 많은 공소를 돌볼 때 본당 신부도 없는 성당을 단원들이 훌륭하게 돌보았으며 소년 단원들은 어린이들의 주일학교 교리를 지도해 주었습니다. 얼마 후 일본군의 진주로 나는 억압에 의한 강제 추방을 당했는데 그 2년 동안의 공백 기간에 단원들이 교회를 지키고 관리 운영해 왔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단장들이 총살당하기도 했었습니다. 단원들은 사제가 없는 어려운 시기에 십자가를 쥐고 교회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치하여 기도하며 신자 확보와 교회를 지켰던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자 중국 교황대사인 리베리 대주교는 중국이 공산화 될 것을 예견하고 사제와 수도자가 없는 중국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나에게 레지오 마리애 조직을 하명하였습니다. 나는 주로 젊은이를 상대로 2년 동안 활동을 전개하여 쁘레시디움을 2천 개 정도 설립하였습니다. 그 당시 공산군들은 중국에 있는 6천 5백여 신부와 수도자들만 제거하면 가톨릭 교회가 제거될 것으로 간주하였으나 젊은 단원들의 활동 때문에 커다란 장벽에 부딪치게 되자 이제부터 레지오를 그들의 최대의 공적으로 삼고 최대의 박해를 시작했습니다.

상해의 한 쁘레시디움 단장은 15년 옥고 끝에 순교하였고 그 당시 젊은 단원들이 약 2천명 정도 순교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단원들이 옥고와 고통 중에 시달렸습니다. 이런 사실은 한국 200년 교회사가 그랬고 전쟁 속에서나 공산치하를 겪은 한국 교우들은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 사실인 줄 압니다. 이렇듯 중국 치하에서는 레지오가 아직도 교회를 옹호하고 있습니다.

어느 공산군 장교는 레지오 단원 1명은 공산군 1개 중대 병력과 맞먹는 영력(영적인 힘)을 지녔다고 혀를 내두른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단원 여러분은 단장과 그 외 간부들을 중심으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첫째로, 전례를 중심으로 레지오 정신을 심화시켜야 하며 제대를 중심으로 성체를 모시고 기도의 생활이 이룩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성인 루도비꼬 몽포르의 헌신의 정신, 즉 성모님을 통하여 예수님께로 일치하는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셋째로, 천주 성삼께 대한 공경과 도우심을 간구하는 태도입니다.

끝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레지오 마리애는 평신도 단체입니다. 교회의 권위하에 속하는 하나의 활동 단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성직자가 교회에 하는 봉사의 일부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나가기 위해 단장을 중심으로 모든 간부와 단원들의 능동적인 참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