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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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레지오 마리애의 역사 #3

작성자
웹마스터
작성일
2016-05-06 15:11
조회
1431

<5> 그리스도를 위한 순례

레지오 마리애의 특성은 온 세계 어디에서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건전한 신자라면 이 성스러운 대열에 참여할 수 있다. 같은 회의석상에 흑인과 백인이 국경과 민족을 초월해서 함께 대열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각 나라에서 레지오 마리애의 정신은 대부분 환영하지만 교본 내용에 있어서 아일랜드 교본 내용을 어떻게 자기 나라에서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반발이 대단히 거세어서 세계 각지로 발전하기에 큰 장애 요소가 되었다.

1932년에 호주에 한 개의 쁘레시디움이 창설되었고, 남아프리카의 3개국이 시작하였다. 1933년에는 미국에서 태동이 되었다. 캐나다에서도 시작되었다.

세계 각지에서 레지오 사절을 청해 옴으로써 열성적인 단원들을 몇 개월씩 파견시켰다. 1933년 프랭크 더프는 장관까지 할 수 있는 자기 직장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레지오 마리애 단원으로 해외에 나가 레지오 선교를 하다 첫 순교자가 된 에델 퀸의 복자 시복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녀는 허약한 몸이지만 레지오 사도직을 수행하기 위해 동부 아프리카에 파견되어 8년 동안 레지오 조직과 활동에 큰 기적을 남기고 순교하였다. 그녀가 순교한 지 12년 뒤에 복자품 심사가 전개되었는데 그녀가 시성되도록 전세계 단원들은 기도를 바치고 있다.

1950년 봄에 알퐁소 람브란 청년은 레지오 마리애의 수도회적인 이상과 가치에 감동되어 입단하였다. 그는 라틴 아메리카로 파견되어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브라질, 파라과이, 우루과이 등에 전파하다가 암에 걸려 27세의 젊은 나이로 선종하였다. 그의 시복 절차도 준비 중에 있다.

 그리스도를 위한 외지 순방 활동운동은 좀더 빠르고 효과있게 전개되었는데 지원자가 늘어가고 프랭크 더프를 초청하는 곳에는 일년에 한두 번 정도는 다녀왔었다. 어떤 단원은 휴가를 얻어 가까운 곳에 파견하여 신앙 선포에 충실하였고 어떤 단원은 자유 시간 전체를 외국에 나가 신앙 선포에 충실하였다.

그리스도를 위한 순례자들이 증가되고 해가 거듭됨에 따라 더블린에서 꼰칠리움의 주최로 매년 10월 마지막 주일에 순례자들이 모여 그들의 귀한 체험을 발표하여 서로 위안과 격려를 받았다. 한국에도 5년 전에 꼰칠리움의 서기를 비롯해서 7명의 단원들이 광주에까지 순례의 활동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교본에 보면 제40장 8항에 그리스도를 위한 외지 순방활동(P.P.C)이란 제목으로 자세하게 소개되었는데 프랭크 더프는 초창기에 외국에 레지오 마리애를 소개하고 조직을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음이 증명되는 것이다. 모든 영혼과 접촉하려면 우선 가까운 사람부터 접촉해야 하지만 또한 일반생활의 범위를 훨씬 초월한 높은 이상적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그리스도를 위한 외지 순방(Peregrinatio pro christo)을 해야 한다는 레지오의 운동이다. 이 명칭은 몽따장베르가 쓴 고전작품 서방의 수도자들 이라는 선교적 서사시에서 유래한 것이다.

프랭크 더프는 합숙소를 경영하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에 봉착했었으나 그 때마다 성모님께 의탁하며 한 번도 후회함이 없이 강력한 의지로 추진하였다. 합숙소를 경영하면서 이런 일도 있었다. 한 창녀는 거의 희망이 없다고 결론 지었을 때 그녀는 바로 같은 날 회심하고 새 출발을 하였다. 어떤 창녀는 합숙소를 오기로 약속했는데 절대 거절하니까 같이 있던 프로테스탄트 신자 창녀가 갑자기 자기가 입소하겠다고 하여 입소한 후 자기 본가로 돌아갔다. 정말로 더블린 시에 평화의 일손을 누가 솔선 수범하여 봉사하겠는가? 프랭크 더프의 신념을 누가 중단시킬 수 있었겠는가? 그는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전단원으로 구성한 기도단을 조직하고 이웃들도 참여토록 권유하였다. 프랭크는 창녀집의 포주들로 하여금 그 집들을 폐쇠토록 권유한 결과 창녀의 집들은 하나 둘 점차 문을 닫았다. 이리하여 경찰이 150년간이나 그 도시의 부분을 정화하려고 노력했으나 큰 성과가 없었으나 프랭크 더프를 비롯하여 몇 명의 단원의 힘으로 성공리에 그 일을 해결하였다. 이것은 바로 사랑과 기도의 힘으로 성취되었다고 확신한다. 이것은 성모님을 따르는 성모군만이 해낼 수 있는 기적인 것이다.

프랭크 더프는 이 어려운 일들이 기적적으로 해결될 때마다 그의 가슴 속에서 뜨거운 신념과 추진력이 솟아 오르고 있었다. 사실 성모님은 당신의 뜻에 합당히 따르려는 착한 자녀들에게, 당신의 신심에 감화되어 봉헌을 선서한 단원들에게 한 번도 실망을 주시지 않았다.

네 개의 팀마다 명칭이 결정되었다. 첫팀은 자비의 모후 라 불렀고 둘째팀은 무염시태 라 불렀으며 셋째팀은 천주의 모친 이라 했으며 넷째팀은 죄인의 의탁 이라 불렀다. 이렇게 네 팀의 모든 관리운영을 통괄하기 위하여 중앙 평의회가 설립되어야 함을 절감하였다. 그리하여 첫팀인 자비의 모후 가 창설된 지 4년이 지난 1925년 11월에 레지오 마리애 라고 중앙 평의회를 부르기로 결정한 것이다. 레지오 마리애 는 프랭크 더프가 9일 기도 후 제안하여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다. 즉 레지오는 로마군대의 명칭이었다. 로마군단은 로마 제국의 공동목표를 위하여 지휘관과 또한 동료 병사들과 결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마치 한 사람이 움직이는 것처럼 움직였던 것이다. 어깨와 어깨를 나란히 이 용사들은 세계를 활보하였고 이들이 나타나는 곳마다 로마의 위엄과 로마의 법률이 들어올려졌다. 그 충성 앞에는 그들과 맞설 적이 없었으며 그들의 불굴의 용기와 완강한 인내 앞에서 적들은 지쳐 항복하거나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로마군단의 정신을 요약하면 권위에 대한 복종심, 변치 않는 의무감, 인내심, 고난을 이겨내는 지구력, 사소한 의무라도 소홀히 하지 않는 충성심이다.

벡실리움(군기) 제작에 있어서도 많은 연구를 거쳐 결정하였다. 로마 군단에서 사용했던 패를 모델로 참고하여 레지오의 정신에 일치하도록 제작하는 데 성공하였다.

레지오 마리애는 특수 사도직이기 때문에 영성이 깊어야 하고 표양이 좋아야 자격이 부여되기 때문에 3개월간이라는 수련기간을 지나서 선서 여부를 결정하게 된 것이다.

레지오 선서문은 너무나 감격적이며 고무적인 내용이다. 교황 바오로 6세 성하께서는 수천 명의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로 하여금 치명할 용기를 갖게 하는 것은 선서문 이라고 격려하셨다.

레지오 마리애 기도문도 아주 성스럽게 작성을 한 뒤 기도의 카드를 장식할 그림을 고안하는 데 여러 가지로 연구하였다. 이 그림은 교회 전문 미술가인 멕골드릭이 제작했는데 십자가와 묵주를 들고 세상의 마귀들과 용감하게 싸우는 성모 군대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이젠 온 세상을 정복하여 하느님 나라 건설의 준비가 다 끝났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성스럽고 강한 신념으로 조직된 성모 군대는 그가 갖추어야 할 무기와 도구를 완비하게 된 것이다.

교본이 필요했다. 레지오가 확산되고 특히 외국에 전파하기 위해서는 교본이 있어야 했다. 사실 그동안 레지오 마리애는 7년간이나 성문화된 교본이 없이 영감과 경험에 의해서 관리 운영을 해왔었다. 프랭크 더프는 교본 제작에 있어서 레지오 마리애의 목적과 영성에 관해서 요약하였으며 관리 운영에 대해서는 지난 7년 동안 경험과 활동해 온 업적들을 정리하여 한 권의 교본을 출판하게 되었다. 당시 교본은 조그마한 작은 책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훌륭한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되었다. 내용에 있어서 성서나 신학 저서에서 인용된 것 외에는 모두가 프랭크 더프의 기교에 의한 것이다. 레지오 마리애가 번창하다 보니 교본도 필요하고 또한 교본 수정의 요청이 여기 저기에서 계속되었으나 쉽게 교회 당국의 승인이 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곤욕을 치르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언젠가는 모든 것은 끝나기 마련이다. 교회의 인가가 나오게 되어서 인쇄에 착수할 수 있었다. 이 교본은 오늘날까지 세계 60개 국어로 번역되었으며 수백만의 판수를 냈다고 볼 수 있다. 그때마다 발행의 진행은 빠르지가 않았다.

항상 여러 가지 애로사항이 있게 마련이다. 한국의 교본은 레지오 마리애를 도입한 후 세 번의 개정판이 1986년도에 출판되었는데 세계 본부인 꼰칠리움에서 개정판이 1985년도에 출판되어 있다. 그 개정판을 가지고 새 번역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