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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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레지오 마리애의 역사 #1

작성자
웹마스터
작성일
2016-05-06 15:09
조회
928

세계 레지오 마리애의 역사
세계 레지오 창설

. 세계 레지오 마리애 창설자

◆프랭크 더프(FRANK DUFF)의 사상과 생애

레지오 교본을 개혁하려는 시도에 저항하여 꾸준히 싸워야 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시도 중에서 실현된 그룹들은 즉시 없어지거나 아니면 얼마 안 가서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프랭크 더프의 회고에서-

<1> 어린 시절

레지오 마리애 창설자인 프랭크 더프는 1889년 6월 7일 성령강림 대축일 아일랜드 수도인 더블린에서 북쪽으로 40Km쯤 떨어진 아담한 도시 트림에서 국가 공무원인 부모 사이에서 4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성가정의 분위기에서 태어난 그는 탄생 이틀 후에 프란시스 마이클이란 세례명을 받았으며 부모의 두터운 신심생활을 본받으며 성장하였다. 학교 교육은 초등학교부터 수녀가 경영하는 데임즈 학교를 졸업하고 명문인 블랙록크 켈레쥐 중등학교를 졸업하는 동안 학업 성적이 대단히 우수하고 봉사 정신이 강했으며 튼튼한 체격을 단련하는 구기 운동을 즐겼다. 또한 영국 식민지 치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자기 민족의 자유를 위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고유의 언어 활성화에 깊게 참여하였다. 그는 19세에 블랙록크 켈레쥐를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국가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됨으로써 봉사의 정신을 발휘하고자 하는, 마음에 드는 직장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놀랄 만한 정력과 강한 의지를 소유한, 주위에서 모두들 촉망하는 늠름한 청년으로 총애를 받았다.

아일랜드는 그 당시 영국의 식민지 치하에서 벗어나 국가의 건설 작업에 한창 분주하였다. 프랭크는 아주 젊은 나이지만 주요 업부를 담당할 수 있는 재원이기에 농림부에 발탁되어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에 착수하였다. 특히 수리가 빠른 두뇌의 소유자인 프랭크는 다시 재무부로 발탁되어 열심히 능력을 발휘하여 정부 초창기에 기강이 없고 질서가 문란해 있는 조국의 정부조직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큰 공로를 세웠다. 그는 무슨 일이나 성실한 생활로 그 일에 몰두하여 책임을 완수하는 습관이 있었고 항상 그에게는 어떤 큰 신념이 꿈틀거리는 듯 보였다. 가끔 먼 하늘을 바라보며 휴식을 취하는 모습은 하느님과 대화하는 시간이었다. 주어진 계획과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항상 밤늦게까지 직장에서나 교회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명감이 강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학창시절에 뛰어난 재능으로 우수한 성적을 획득한 것만 보아도 그의 성실성을 확인할 수 있다. 어떤 일에나 소홀함이 없는 차분한 자세로 친구와 이웃에 좋은 인간관계를 가졌고 그와 친교를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친근감이 있는 다정다감한 사나이로서 특히 시간과 약속을 잘 지키는 이상과 희망에 가득 찬 진취적인 사람으로 칭송을 받았다.

 <2> 신심 생활

우리 속담에 콩 심은 데는 콩이 나고 팥 심은 데는 팥이 난다고 했듯이 두터운 신심의 성가정에서 태어난 프랭크는 유년시절부터 부모의 손을 잡고 교회에 다니는 신앙생활이 이젠 몸에 익어 성인이 된 후에는 매일 영성체를 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사실 영성체는 영적인 영양분이기에 우리들이 음식을 먹어야 육체를 지탱할 수 있듯이 영성생활로 하기 위해서는 성체를 모시는 일이 가장 중요한 신심생활이라 믿는다. 일상생활이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온종일 교회를 떠나서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 것이다. 더군다나 그가 24세 되는 해부터는 사제들이 매일 바치는 성무일도를 매일 바치기로 결심한 후 일생 동안 하루도 결하지 않는 신심생활을 영위하면서 기도생활을 하였으니 그의 열성을 짐작할 수 있다. 그 당시 성무일도는 라틴어로 된 내용뿐이기 때문에 기도문마저도 한 시간 반 정도의 시간을 소요했었다. 그는 친근한 친구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큰 은총을 받는 것 또한 한 번도 성무일도를 결하지 않은 데서 온 것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그가 저술한 교본에서도 높은 등급의 단원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성모소일과(성무일도의 레지오 축약판)를 바치도록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영성생활을 하면서 유의해야 할 것은 누구나 하기 힘든 겸손한 자세인데 프랭크는 모든 공로를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돌렸다. 레지오가 전세계적으로 조직이 확산되어 세계 각지의 주교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을 때에도 그는 모두에게 그 기쁨과 공로를 돌리곤 하였다. 그는 세계 모든 레지오 지도자와 단원들과의 서신에서도 언제나 겸손한 인사와 내용으로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그는 부드러운 손길만이 레지오의 큰 칼을 휘두를 수 있고 그칠 새 없이 샘솟는 정열은 고요한 생각과 두려움에서 나온다고 강조하였다. 우리들의 마음 속에서 타오르는 불길은 미천하면서도 비세속적인 특징을 지닌 재로부터 솟아나는데 그 속에는 겸손의 덕이 있으나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산다. 그럼에도 이 겸손의 덕은 고귀하고 굳세며 그것을 추구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존엄성과 힘을 베풀어준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레지오를 창설한 후 겸손한 생활을 하라고 단원들에게 강조하였다. 단원 활동 중에서 대인관계가 대부분인데 겸손치 못한 행동을 한다면 이는 레지오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겸손하라고 바라시는 것과 같이 프랭크도 타고난 덕성과 갈고 닦은 신덕으로 평신도 사도직의 창설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분의 겉과 속이 겸손이란 미덕으로 녹여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마도 성모님의 겸손을 본받았을 것이 확실하다. 성모님은 비할 데 없는 지성을 통하여 당신이 누구보다도 많은 은혜를 받으셨기에 당신만큼 하느님 앞에 많은 빚을 진 피조물이 따로 없다고 깨달았기 때문에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성모님의 몸에 밴 우아한 겸손의 태도를 본받아야 하며 성모님의 겸손으로 단원생활을 하자고 강조하였다.

프랭크 더프는 세계 각지에 파견된 단원들과 산하 각 평의회 간부 및 단원들과의 서신 연락에 있어 충분한 시간을 아쉬워하던 중 일생에 다시 복귀할 수 없는 직장을 포기하였다. 그는 직장에서도 아주 성실히 생활했기에 재무부장관까지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레지오 사도직에 보다 더 풍부한 봉사를 하기 위해서 사표를 내고 말았다. 친구들의 위로에 그는 직장을 그만 두는 것에 대하여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공언하였다.

그는 온종일 레지오의 확산에 전념하며 밤늦게까지 봉사하고 완전히 기진맥진하여 한밤 중에 귀가하여 등의자에 기대고 잠들다가도 두세 시간 뒤에 일어나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성무일도를 바치곤 하였다. 직장까지 포기하려는 프랭크 더프의 신념에 그의 고해신부는 부당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오직 성모님의 착한 아들로서 레지오 사도직 수행만이 일생의 과업임을 확고하게 다지며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3> 개척자회의 활동

프랭크 더프의 조국인 아일랜드는 수십 년 동안 영국의 식민지 통치하에 많은 수난을 당한 국가이다. 식민치하의 여러 가지 비도덕적인 행위가 누적되는 가운데 국민들은 생활고마저 겹쳐 주정뱅이가 늘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조국의 타락상을 보고 애국애족의 젊은 청장년들이 설립한 모임이 개척자회이다. 개척자회의 목적은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주벽으로 인한 아일랜드의 전국적인 폐습에 대한 보속 정신으로 술종류에 속한 모든 술을 일평생 절제키로 약속하고 실천하는 데 있다. 이러한 숭고한 목적으로 조직된 개척회원들은 주기적인 모임을 통하여 서로 생활 나누기를 하며 봉사할 일들을 토론하여 결정하고서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그는 개척자회에 가입토록 권유를 받아 기꺼이 입회하고서 열심히 활동하였다. 그가 입회한 후 첫번째 한 활동은 변절자 만들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프로테스탄트의 공세를 물리치는 사업에 뛰어들었다. 어느 날 그는 친구의 소개로 가벳트란 조그마한 구두방 주인을 소개받았다. 그와 프랭크 더프는 배가 고픈 가톨릭신자들을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이 주일마다 길목에 서서 음식을 대접하면서 개종하기를 권유한 사실을 직접 목격하고서 큰 충격을 받았다. 배가 고파서 눈치를 보며 프로테스탄트 교도의 식당으로 가는 교우들을 막기 위해서는 간이 식당을 운영하기로 하고 가벳트와 그 일에 착수하였다. 프랭크 더프가 시도한 간이 식당 운영은 6년 반만에 이용자가 적기에 폐문하였다. 그러나 뜻있는 다른 분들이 매주 문을 열어 19년이나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개척자 회원들이 모두 남성으로 구성되었으나 봉사정신이 강한 엘리사벳 커완이란 중년부인이 참여한 뒤 처녀들과 여성 협력자들이 적극 참여함으로써 써클의 구성이 필요하게 되었다. 매주 모임이 있는 이 개척자회는 남성들은 대부분 빈첸시오회 봉사를 하고 여성들은 교리교육을 주로 담당하였다. 개척자회는 원래 알코올성 음료를 보속정신으로 절대 멀리한다는 목적으로 출발한 모임이지만 건전한 정신과 굳은 신앙으로 무장된 청장년과 여성으로 하여금 큰 보람과 봉사정신을 발휘하는 좋은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개척자회는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으며 그동안 많은 봉사활동을 하여 국가 발전에 공헌하였으며 가톨릭의 단체로서 평화를 누리고 있다. 그리고 평신도 사도직의 특수한 신심단체인 레지오의 모체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