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9일

자료실

한국 레지오 마리애의 역사 #2

작성자
웹마스터
작성일
2016-05-06 15:07
조회
818

2. 한국 레지오의 도입과 발전

[1] 도입과정

한국에 레지오 마리애가 도입된 것은 1953년 5월 31일 당시 광주교구장이신 현 하롤드 대주교의 지도로 목포시 산정동 본당에  '치명자의 모후' 쁘레시디움과  '평화의 모후' 쁘레시디움 그리고 경동 본당에  '죄인의 의탁' 쁘레시디움이 설립되었다. 이어서 광주, 청주, 춘천, 원주, 전주, 서울, 제주 지역의 각 본당에 확산되어 각 교구에 확장 되었다.

초창기 각 쁘레시디움은 아일랜드 더블린의 꼰칠리움 직속 쁘레시디움으로서 꼰칠리움의 지시를 직접 받았고, 사업보고를 하였다.

1955년 10월 9일에는 한국 최초의 꾸리아가 창단되었는데 산정동 3개 쁘세시디움(치명자의 모후 쁘레시디움, 평화의 모후 쁘레시디움, 동신자의 모후 쁘레시디움)과 경동 죄인의 의탁 쁘레시디움 및 함평 전교의 모후 쁘레시디움 등 5개의 쁘레시디움으로  '목포 매괴의 모후'꾸리아가 탄생되었다.

1956년 8월 7일에는 광주시 북동 본당 산하 8개 쁘레시디움으로  '중재자이신 마리아' 꾸리아(CURIA MEDIATRICS)가 설립되었으며 1956년 12월 6일에는  '중재자이신 마리아' 꼬미씨움(COMITIUMMEDIATRICS)으로 승격되었다.

1957년 3월 3일 한국 최초의 소년 꾸리아인  '목포 천지의 모후 꾸리아'가 창설되었다. 이어서 1957년 6월 10일에는  '광주 바다의 별 꾸리아'가 설립되었다.

레지오 사도직의 소개가 잘 되어감으로 인하여 교구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모든 본당마다 앞을 다투어 쁘레시디움 설립이 가속화 되었다. 사제와 수도자의 손과 발의 역할을 하며 정성을 다하여 봉사하고 자신들의 성화에 소홀함이 없이 모범적인 신심생활을 하였다. 특히 광주대교구는 한국 본산지답게 레지오 사도직에 참여도가 높았으며 교본 규칙에 따라 전국을 지도하며 착실히 성장해 나감으로써 좋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1957년 5월 7일에는 세계 본부인 꼰칠리움으로 부터 한국 레지오 마리애의 지도적 역할을 광주 중재자이신 마리아 꼬미씨움에 의뢰한다는 승인서를 받게 되었다.

이듬해 1958년 7월에는 세계 본부인 꼰칠리움에서 한국 중재자이신 마리아 세나뚜스(SENATUS MEDIATRICS?국가평의회)를 승인하였다.

한국에 레지오 마리애가 도입된지 5년만에 전국적인 조직을 완료하여 국가평의회를 운영하게 된 것이다. 각 교구에 레지오 마리애가 아래와 같이 전파되어 활성화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