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9일

역사/연혁

레지오 마리애
부산 레지오 마리애의 역사

한국 레지오 마리애의 역사

  1. 한국에 레지오 마리애를 도입한 현 하롤드 대주교

 

‘여기 동방으로 뛰어들고자 했던 이 잠들다.’

 

이 말은 어느 날 현 대주교님이 공동 묘지 어느 곳에 있을 당신의 묘비를 상상하며 떠올린 문구이다. 현재 제주시 가톨릭 묘지에 있는 그분의 묘소에는 이러한 비문은 없지만, 그분이 바로 동방으로 뛰어들어 밝은 빛이 되신 하롤드 헨리(Harold Henry) 현 대주교님이다.

 

현 대주교님은 미국 미네소타 주 노스필드에서 1907년 7월 11일, 프로테스탄트 신자인 아버지 프랭크 헨리와 어머니 미네바 쉐스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나 모라비아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잦은 전직으로 자주 이사를 다녀야 했던 그는 여러 종류의 다양한 종교에 접하게 되었으며, 6년 동안에 국민학교를 무려 일곱 차례나 옮겨 다녀야만 했다. 열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께서 가톨릭 신자인 여성과 재혼하기까지 일 년여 정도를 친척 집에 얹혀 지내기도 하였다. 이처럼 하롤드가 자주 옮겨 다니는 것을 본 이복 누이 이사벨이 그에게 가톨릭 재단인 성 스테파노 학교에 입학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는 가톨릭 신자가 되지 않아도 좋다는 학교의 승인을 받고 그 학교에 입학했는데, 사실 그때 그는 가톨릭의 사제란 사악한 힘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 힘으로 자신을 꼼짝 못하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입학한 지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한 신부님으로부터’성체 안에 계시는 주님’에 관한 강의를 듣고서 가톨릭 교회란 성모 마리아만을 흠숭한다고 여겼던 종래 자신의 생각이 그릇되었음을 깨닫고, 가톨릭에 심취하게 되어 드디어 1922년 5월 12일 세례를 받았다.

 

그 무렵,  ’동방’이라는 잡지를 통해서 선교사의 삶에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중국 선교에 대한 강한 열망를 키우기 시작하여, 1918년 설립된 성 골롬반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영세한 지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과 부모님의 결혼 문제로 약간의 어려움을 겪었고, 그곳 오마하에서 일 년을 지낸 후 실버 크리크로 옮겨 학업을 마치고, 1926년부터 1931년까지 아일랜드의 성 세넌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만일 아일랜드에 가지 않았더라면 성직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여길 만큼 그곳에서의 생활을 소중하게 생각하였다. 성 세넌 대학에서 학업을 마친 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10년간의 신학교 생활을 마치고 1932년 오마하의 성 골롬반 성당에서 주님의 백성의 목자인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그토록 열망하던 중국 선교를 위한 머나면 항해에 오르게 되었는데.…… 하느님께서는 그를 위해 전혀 다른 곳에 자리를 마련하셨다. 중국 사회가 혼란하여 항해 중에 갑자기 중국 대신 한국 선교로 소임이 바뀌어, 항해의 목적지는 중국이 아닌 더욱 낯선 동방의 나라 한국이 되었던 것이다.

 

1933년 일곱 명의 동료와 함께 한국에 입국한 후 대구에서 언어 수업을 받았다. 아일랜드의 신학교에서 달필로 유명했던 그로서도 한국어를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해 했으며, 더구나 일본 식민지 치하라 일본어까지 배워야 한다는 이중의 부담을 가졌다. 그러나 자신이 배운 바를 전파하고자 하는 열의에 가득찬 젊은 선교사로서’한국말 모릅니다’고 말해야만 하는 고통을 통해서 아주 자연스럽게 겸손을 익히게 되었고,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많은 부분을 자신의 첫 부임지인 노안 본당에서 신자들과 접촉하면서 터득하였다.

 

이방인들에게 이 언어 문제와 병행하는 것이 다름아닌 음식 문제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이러한 언어나 음식에 따르는 문제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었으니, 정말로 그가 도전해야 할 문제는 본당 신자들이 그를 낯선 외국인으로 바라보는 시각, 그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더 이상 이방인이어서는 안된다고 판단하고 우리 한국인들과 동고 동락하며 완전히 하나가 되기 위하여, 즉 완전 적응을 하기 위하여 우리의 고유한 문화와 관습을 이해하고자 각종 풍속에 참여하면서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 후 나주로 부임하여 교세 확장과 더불어 새 성전을 건립하고,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의해 교육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배움의 터전을 마련해 주는 등 날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오랫동안 현 대주교님을 감시해 오던 일본 경찰들의 압력은 더욱 거세어져만 갔다. 1941년 6월부터는 아예 스물네 시간 내내 감시하더니, 진주만 사건이 터지자 휴가를 요청하여 목포로 내려가 있던 그를 연행하여 단지 미국인이라는 죄명으로 급기야 나주 감옥에 감금시켰다. 다시 광주 사제관으로 이송되어 연금되었다가 1942년 본국으로 강제 송환 당한 이후로는 미국 종군 신부로서 활약하여 동성 훈장을 수장하였다. 이는 그분이 사제로서 군인 세계에 완전 적응했음을 보여 주는 단적인 증거라 할 수 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그곳 골롬반 신학교의 강의를 맡았는데, 이 시기는 그분의 생애 중 가장 평탄했던 시절로서 그분은 그다지 흡족치 못하게 여겼다. 그것은 당신 마음속 깊이 한국이라는 나라가 크게 자리했기 때문이었다.

 

1947년, 주교 대리로 임명된 후 한국에 다시 온 그는 이제 일본군의 감시가 사라진 대신 새롭게 부딪쳐 오는 문제가 있었으니, 이는 공산주의에 의한 국토의 양분과 사회 혼란이었다.

 

미국 델라웨어 주에 있는 웰밍톤 다리는 현 대주교에게 있어서 행운의 다리이다. 동란 이후 광주교구의 재건을 위한 모금을 위해 순회하시다가 그 다리에서 몬시뇰의 임명 소식을 전해 받았으며, 후에 다시 그 다리를 건너다가 대주교가 된다는 소식을 접한 다리이기 때문이다.

 

6/25동란 후, 재건 사업과 예비자 교육, 의식주 해결 등의 문제로 동분서주 여유가 없는 가운데서도 그는 다시금 병원과 진료소의 필요를 절감하고 수도회의 도움을 받아 의료사업을 시작하였다. 또한 나환자의 자립을 위해 -나환자들이 존경의 뜻으로 헨리를 한글로 ?현?이라 명명한- 현애원, 호혜원 그리고 영암 등 세 군데에 자활촌을 마련하였고, 소록도에 미감아를 위한 육아원을 설립했다.

 

이처럼 육체는 병원에서 그리고 영혼은 교회에서 돌본다지만, 정신을 위해서는 아직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느낀 그는 한국인들의 교육열에 힘입어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다. 그 가운데 대건신학교(지금의 광주가톨릭대학)의 설립만큼 그의 시간과 정력을 소모케 한 것은 없었다. 신학교 설립을 위한 자금 마련에 애쓰다가 심장병이 더욱 악화되기도 했다.

 

까리따스 수녀회. 골롬반 수녀회, 과달루페 선교회, 글라라 관상 수녀회, 사랑의 씨튼 수녀회, 천주의 성 요한 의료 봉사 수도회, 예수 고난회 등 여러 수도회의 진출과 사회 복지 기관의 도움으로 본당과 공소 건립, 병원과 진료소, 중?고등학교, 신학교, 피정센타, 유치원 등을 건립하고, 평신도 사도직 활동으로 레지오 마리애를 도입하는 등 노약자나 신체 장애자, 그리고 고아나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이처럼 혼신의 힘을 쏟을 수 있었던 것을 그는, 당시 공산당에 의해 처참히 죽어간 몬시뇰 브렌난을 비롯한 많은 신앙인들의 피 흘림에 대한 대가라고 여겼다.

 

미국에 다녀오는 길에 일본에서 레지오 주회를 하는 것을 보고 감격하고서 바로 꼰칠리움에 연락하여 1953년 5월 31일 목포에서 레지오를 창단하였다.

 

광주대교구에서 회갑을 지낸 현 대주교는 장성한 딸을 부모가 사위에게 내주듯이 한공렬 주교에게 광주대교구를 인계하신 후 1971년 제주교구장으로 부임하였다.

 

죽음이 임박해 오면서 그가 겪은 커다란 변화는 점차 신비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인간의 의지로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고 여겼으나, 이 신비의 영역에 접하면서부터는 자신이 하느님의 도구로서 어떤 역할을 부여받았음을 하느님께 감사드리게 되었다.

 

현 대주교는 1976년 3월 1일 월요일 아침, 향년 66세로 미사 준비 기도 중에 선종하셨다. 장례식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그분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다.

 

‘고인의 일생은 선교 자체였습니다. 고인의 생활 태도는 우리 모두가 우리의 형제에게 사랑을 베풀며 살도록 하는 메시지였습니다.’

 

위의 조사는 바로 그분의 삶을 요약해 설명해 준 것이라 할 수 있다.